보따리 170 보따리 170(about Bottaree 170)

일러스트: 안재철               

보따리 170

주소:부산시 부산진구 동평로 170

김경화 개인전 "소망세트" 전시(exhibition)

김경화 개인전 "소망세트"
기간:2014. 12. 18 - 31
장소:보따리 170

Kim Kyung Hwa solo exhibition 'A set of Hope'
Dates:2014. 12. 18 - 3
Venue: Bottaree 170


ZYHH+, 김미영-투영, 김성철-집착 전시(exhibition)

ZYHH+, Mi-Young Kim, Sung Chul Kim

Dates: 2014.11.22 (5pm)-12.10

Vanue: Bottaree 170 (Busan, S.Korea))

Open hour:11am-7pm 


ZYHH+, 김미영-투영, 김성철-집착

전시기간: 2014.11.22 (5pm)-12.10

전시장소: 보따리 170 (부산시 부암동 276-38)

관람시간:11am-7pm (매주 월요일 휴관)


참여작가

김미영, 김대홍, 김성철(한국), 데니스 지글러(Denise Ziegler/핀란드), 노부키 야마모토(Nobuki Yamamoto/일본), 피터 홈가르드(Peter Holmgård/덴마크)


후원: 도서출판 비온후, 라움 건축사무소, 대정 종합건설


ZYHH 프로젝트

ZYHH는 4개의 다른 도시-도쿄(야마모토 노부키), 부산(김대홍), 코펜하겐(피터 홈가르드) 그리고 헬싱키(데니스 지글러) 2012년에 시작된 프로젝트이다. 구성원 중 한 명이 미션(액션)을 제안하면 나머지는 각자가 활동하는 도시에서 그 설명에 따라 미션을 행하고 그것을 사진으로 변환하여 서로에게 보내는 방식이다. 완성된 미션(액션)은 온라인(peterholmgaard.dk, redhong30.eglools.com)에 전시하고, 우리는 이 프로젝트가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며 멈추고 싶을 때 프로젝트를 마치기로 하였다. 

그간 이메일을 통한 수많은 의견교환과 온라인 포스팅, 그리고 일본 그리고 덴마크에서 전시를 했다. 2013년 11월, 부산에서의 그간의 과정과 액션 그리고 한국의 작가(김미영)와의 협업을 통한 ZYHH+를 전시하고 이제 이 프로젝트는 종료된다. 


ZYHH project

ZYHH is an art project, which is produced by four artists-Denise ‘Z’iegler(Helsinki), ‘Y’amamoto Nobuki(Tokyo), Dae-‘H’ong Kim(Busan) and Peter ‘H’olmgård(Copenhagen)-who live and work in four different cities. ZYHH is based on online conceptual project that has been 2012. 

The concept of ZYHH is from simple process. One of members makes a plan and then sends it to the others with an instruction how to perform it. 


Every member follows the instruction, transforms into a photograph, shares it one another and posts those on the web-site(http://peterholmgaard.dk). We have repeated the above mentioned process, which we called ’actions’ 7 times and also  animated that in physical places, Japan (AAC Festival, Aizu Mishima) and Denmark (Holmgård gAlleria, Copenhagen). ‘ZYHH+’ is an another variated exhibition, which collaborated with a Korean artist Mi-Young Kim) in South Korea. 





김미영_투영


작업을 해가면서 내가 묻고 싶은 게 무엇인지 추적해 가기를 즐겨 한다. 의문을 가지고 질문을 하는 것은 생과 성장의 동력이라고 보기 때문에 나는 구해지는 답 자체보다는 질문을 찾아내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므로. 

그리고 이에 더욱 부드럽게 접근하기 위하여 예술의 유연성을 이용하고 실험하면서 나를 포함한, 세상에 내재한 질문들을 찾아간다.  


연유 없이 어느 특정 사물이나 순간에 사로잡히는 때가 있다. 한 일화로, 마음이 폭풍에 휘말리던 시절 거울에 유독 마음이 가닿았다. 글쎄다…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어딘지 고단하고 측은한 마음이 이는 게 아니겠는가. 포근하거나 향기로운 구석이 있지도 않고 쌩- 하니 차가운 느낌, 깨지면 위험해지는 그 물체에 어찌 그런 마음이 든 것인지, 그 마음을 ‘바라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 사물과 어울릴 법한 단어들(반, 합의)을 찾아내어, 언어를 물체와 결합해 이미지로서 요리해보기도 한다. 


특정한 성질의 물체나 형상을 특정한 단어와 반죽하면 어떠한 질문을 하기가 한결 수월해진다. 그것은 시나 개그처럼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보인다.

몇 가지 예로, 펜이 아닌 물로 문장을 쓰고 그 증발 과정을 지켜볼 수 있고, 빛으로도 글을 쓸 수 있으며, 반사 속성을 가진 거울이라는 사물과 단어를 결합할 수도 있을 테고, 혹은 텅 빈 것, 흔적을 통해 어떤 단어( 단어의 의미/단어와 관련된 연상 )를 떠올리게 해볼 수가 있다.


작업을 시작하던 초반, 주된 주제는 ‘역지사지’였는데 많은 작가가 그렇듯이 나 역시도 성장배경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부분을 다루게 되었다. 역지사지가 성립된다면 평온한 세상이 될 터인데… 하면서.

그리고 이후에 ‘언어’를 도마에 올려 손질하게 된 것도 위와 같은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어라는 게 서로의 의중을 전달하는 기능을 하지만 글쎄… 나에게는 말이라는 게 상당히 두려웠고 위험해 보였다. 어딘가 모르게 언어의 울타리 속에 갇힌 기분. 언어의 지배를 받는 기분이 되어버려서.

모든 것을 언어가 명하고 정의 내려주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나무를 볼 때 그것 그대로만 바라보는 것이 어렵다. 시야에 잡히는 순간 ‘나무’라고 순식간에 먼저 떠올리게 되고, 그 명제 아래 대상을 보게 되면, 바로 눈앞의 나무를 두고도 관념 속의 나무를 보는 경우가 많다.


언어가 인간사 거의 모두를 지배 중이라고 보고 있다. 존재하는 것에 이름 붙여주기 그 기능 이상을 넘어 내가 동의한 바 없는 규범, 질서, 관념 등에까지 손길을 뻗쳐 그것들이 마치 절대적인 듯 규정짓는 행태에 대해, 정당한가라고 왜 물을 수 없겠는가.

언어의 이러한 모습은 상당히 위험해 보였다. 규정짓는 것은 고정적 관념, 편협함을 만들어 낼 수 있고, 구분 지으며 서로 간의 배척을 동반하기에 모두가 동등한 수평 구도 관계 성립이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쉬운 예를 들어보자면, ’당신은 장애인이다.’ ‘당신은 동성애자이다.’ ‘당신은 미혼모이다.’ ‘당신은 외국인 노동자이다.’ ‘당신은 여자다.’ 등에서 그들에게 이런 명제의 굴레가 없다면, 그들은 그저 ‘한 사람,’ ‘하나의 존재’로서만 살아가면 된다. 그런 굴레에서 탈출만 할 수 있어도 그들의 삶이 얼마나 깃털과 같아지는지, 이렇게 점찍히지 않은 사람들은 짐작도 못 할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두려웠던 것은 감정이나 생각조차도 언어로 번역 가능한 범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을 때였다. 말로 전환하지 않고 눈앞에 놓인 그대로 보는 것, 마음에서 일어나는 그대로 느끼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던가…’솔직해지기’ 어렵다. 힘들 땐 백 마디 위로보다 옆에서 따뜻한 온기로 손 한 번 꼭 잡아주는 게 더 힘이 되지 않던가. 그렇게 또 언어란 게 허탈한 면도 있고, 약도 없는 상처를 만들기도 하는데 우리는 그런 부분을 얼마나 인지하며 살아갈까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득해진다. 나는 이러한 바들을 조물조물해서 그 접시를 다른 사람에게도 넌지시 건네본다. 그들이 그것을 맛볼지, 무슨 맛을 느낄지……. 



< 거울 이야기 1 >


거울을 ‘그’라고 불러본다면…


그를 바라본다. 나를 보려는 게 아니라 그, 자체를 보고 싶어서. 그러나 바라볼수록 다른 사물, 배경만이 눈에 더 들어올 뿐. 색깔을 가지지도 못했고 투명한 것도 아닌, 너의 정체는…

반사 작용이라고? 그런가? 내 눈에는 그가 모든 것을 흡수하여 품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어쩐지 고단하고 측은해 보인다.

누가 그를 알아볼까… 모두가 그를 바라보지만, 사실 그들이 보는 것은 자기 자신. 존재하되 인식되지 못하는 유령이 된 기분이 그럴까?

나를 숨죽여 남을 비춰 보여 줘야 하는 그의 임무. 타고난 속성상 그 노릇을 쉼 없이 해야 하는 그의 생.

마치 일생 두 눈 부릅뜨고 자지도 못하고 누군가를 지켜봐야 하는 사람 같아 보였다. 그도 한 번쯤 눈 감고 안식을 취하고 싶지 않았을까… 남을 위해 존재하는 듯한 기분으로 그는 물었겠지. ‘그럼… 나는 무엇이고, 내 인생은 무어냐고….’

내게도 ‘그’와 같은 역할을 해야 했던 개인사가 있었기에 까닭 모를 감정이 일렁이며 나도 같은 질문을 했겠구나 하고 짐작해본다. 사람도 관계를 통해 서로의 거울 역할을 하니까… 타자가 비춰 보여 주는 것으로 자기를 확인하고 인식하기가 쉽지 않던가. 한 세상 살면서 아마도 절대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는 것은 자기 얼굴일 것이다. 나와 대면하는 것, 나와 악수하는 것. 어렵지…

분주하고 요란한 그의 앞모습과 달리 그의 뒷모습은 고요했고, 조용히 내려놓은 그림자도. 함께 있었다. 그곳에 그의 방식과 그의 세상이 있었다. 있는 듯이 없는 듯이 그렇게.



김성철-집착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공간 속에는 무수히 많은 사물들이 존재한다. 그 사물들은 가치를 잃고 사라지거나, 아니면 또 다른 모습으로 공간 안에 채워진다. 나의 작업실에는 내가 쓰임새가 있다고 판단되어진 다양한 사물들이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언젠가 쓰일 거라고 생각된 사물들은 여전히 책임감을 완수하지 못하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쓸모가 있다고 판단되어진 그것들, 그 사물들은 나에게 있어 지금까지 불필요한 것들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 사물들을 버릴 수가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언젠가 쓰임새가 있을 거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버리지 못하는 잘못된 습관이 삶의 방식을 복잡하게 만든다. 

이러한 습관은 나의 성격과도 관계가 있다.

 인간의 성격은 어린 시절에 뿌리를 내리며, 부분적으로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고, 쉽게 바뀌지 않는다. 성격은 개인마다 어느 정도 다른 독특한 특성을 지닌다.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사고를 한다면 거기에 성격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격은 타고난 소질과 성장하는 가운데 경험을 통해 습득한 경향성의 복합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 존재한다. 따라서 타인들의 영향을 받게 되면 이것이 그의 성격형성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친다 (나는 내가 낯설다 - 티모시 윌슨).

  집착을 하면 할수록 나는 피곤함을 자주 느끼게 된다.  나의 복잡한 감정들이 나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는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다보니 내가 피곤한가보다. 나의 이런 감정들을 치유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가끔 고민해 본다.

 나는 자주 타인과의 대화에서 어려움을 느낀다. 내가 어떤 것을 말하고 싶은데, 말하지 못하니 답답하고, 서로 피곤하며 그 자리가 가시방석과도 같다. 이런 소통의 부재를 가려움으로 풀어 작업을 한다. 집착을 버린다면 삶은 방식은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속세에서 그것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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